작년 5월에 일어났던 일이다.
대학교에 들어와 슬슬 친구도 여럿 생기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친구 A가, B랑 C가 자기네 집에서 술을 먹고 있는데 나도 오라고 전화를 했다.
시간은 이미 밤 9시를 넘긴 터였다.
게다가 A네 집은 우리집과는 대학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 방향에 있어, 전철 환승까지 해야 할 정도로 꽤 멀리 있다.
하지만 딱히 할 것도 없는데다, 마침 토요일 밤인데 혼자 있기도 심심했던 나는 A네 집에 가기로 했다.
전철을 타고, 환승을 하려고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무척 적다는 걸 깨달았다.
토요일 밤인데, 이렇게 사람이 없나 싶었지만, 전철이 도착했기에 별 생각 없이 올라탔다.
그런데 전철 안도 텅 비어서, 만취한 남자 둘만 앉아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앉아서 휴대폰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다음 역에서 술에 취한 두 남자는 내리고, 그 대신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타서 내 바로 앞에 앉았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문득 휴대폰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그 여자아이가 정말 예뻤던 것이다.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조금 어른스러운 얼굴이라 딱 내 타입이었다.
딱히 여자아이랑 말하기 힘들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태 솔로인 내가, 초면인 여자한테 선뜻 말을 걸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특별한 일이 생길리가 없지' 하고 체념한 채, 슬쩍슬쩍 그 얼굴만 훔쳐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와중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뿔싸, 뭔 이상한 놈인가 싶겠구나.
당황한 나는 눈을 슬쩍 돌려서, 계속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것 마냥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누가 봐도 빤히 들통났을 것이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다섯 정거장이나 남았다.
나는 '이걸 어쩐다. 다음 역에서 내릴까... 하지만 그러면 괜히 더 부자연스럽겠지?' 하고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후훗.]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어라?' 싶어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즐거운 듯 웃고 있다.
그리고 재밌다는 듯, [왜 그러세요?] 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와, 뭐지? 만화 같은 데서나 나올 일이잖아!' 하고, 마음 속으로 잔뜩 들떴지만, 어떻게든 겉으로는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아니... 그냥 밖을 보고 있었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킥킥 웃으면서, [나 다 봤다구.] 라면서 자리를 내 옆으로 옮겼다.
솔직히 기뻐 날뛰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겉으로는 미안하다는 듯 [미안, 보고 있었어...] 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리고 15분 가량, 나는 그 아이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이름은 아케미라고 하고, 학과는 다르지만 우리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그 때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니, 분명히 아케미의 말은 좀 이상했다.
최근 화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몇 년 전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시사 관련해서는 무척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난번 지진 무서웠었지.] 라고 말을 건네자 갑자기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저 단순히 예쁜 여자아이랑 친해졌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어서 당시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나중에 와서 생각해보면 분명한 부자연스러움과 위화감이 있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자신이 겪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얻은 정보를 그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들떠있는 와중에도, 딱 한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있었다.
전철이 달리며 철컹철컹 흔들릴 때마다, [철컥... 철컥...] 하고 플라스틱 같이 가볍고 딱딱한 게 서로 부딪히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도췌 알 수가 없었다.
아케미는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래?] 라고 물었지만,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다 싶었던 나는 [아니, 별 거 아니야.] 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소리의 정체에 관해 나중에 알게 되리라곤, 그 땐 차마 상상도 못했다.
전철이 목적지 전전 역까지 도착했을 때, 아케미의 가방 속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아케미는 가방을 열고 휴대폰을 안에서 꺼냈다.
그리고 가방 안에 들어있던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나는 보고 말았다.
여기저기 잔뜩 녹이 슬어있는, 엄청나게 큰 식칼 두 자루였다.
10대 여자아이가 들고 다닐 리가 없는 물건이다.
아니, 굳이 10대 여자아이가 아니더라도, 이런 걸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아케미는 휴대폰을 꺼내고 바로 가방을 닫았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그 사이에도 [철컥... 철컥...] 하는 이상한 소리는 계속 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겨우 주변 상황을 분석할 생각을 했다.
'애초에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눈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나한테 말을 걸어온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잖아? 그렇게 일이 휙휙 잘 풀릴리가 없는데... 혹시 이 아이 위험한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의심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이대로 원래 내리려던 역에서 내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일단 다음 역에서 내리기로 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내리려하면, 혹여나 따라 내릴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변명도 못하고 괜히 궁지에 몰릴게 뻔해서, 나는 전철이 역에 도착하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머릿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는 사이, 전철이 역에 도착했다.
아케미는 아직 전화를 하고 있지만, 그 사이 계속 슬쩍슬쩍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거짓웃음을 띄우며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곧 문이 닫힌다는 방송이 나온다.
나는 그와 동시에 [미안, 나 여기서 내려야 해.] 라고 일방적으로 고한 뒤 전철에서 뛰쳐내렸다.
아니나다를까, 아케미는 제대로 반응도 못했고, 금새 전철은 역을 떠났다.
겨우 상황을 모면한 나는,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싶어 오싹하면서도,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A네 집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아니, 애초에 대학에 온지 2개월 정도 밖에 안 된 나에게는, 이 동네 지리는 도췌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전철을 탔다가, 다음 역에서 아케미가 기다리고 있으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A에게 전화를 해, 사정은 가서 이야기 해주겠다고 한 뒤, 주소를 물어 택시를 탔다.
아케미를 다시 한 번 만나느니 택시비 내는 게 훨씬 싸게 먹힐테니까.
A네 집에 도착한 뒤 조금 안정을 되찾은 나는, [야, 진짜 큰일이었어. 엄청 무서운 일을 당했다니까. 무섭다, 무서워.] 라며 호들갑을 떨며 친구들에게 지하철에서 겪은 일을 떠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고, [거짓말 하고 앉았네.] 라며 비웃을 뿐이었다.
그 때, 딩동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 가까운 터였다.
이런 시간에 찾아올 손님은 왠만해서는 없다.
나는 혹시 아케미가 아닐까 싶었지만, 분명히 제대로 뿌리치고 도망쳐 왔으니 아닐 것이라는 마음 뿐이었다.
B는 그런 나를 보고 농반진반으로, [혹시 아케미 아니야?] 라며 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말을 꺼낸 B는 물론이고, 거기에 있던 전원이 움찔하고 말았다.
A는 [야... 아까 그 이야기 진짜였냐...?] 라며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문에 달린 구멍으로 누가 있는지 보고 오겠다며 현관으로 향했다, 잠시 뒤 조용히 돌아왔다.
[야... 엄청 예쁜 여자아이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문 앞에 서 있어...]
그 사이에도 초인종은 몇 번이고 계속 울린다.
C는 얼굴이 새하얘져서 [너 진짜였냐... 어떻게 따라온거야...] 하고 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하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온거지?
나는 [일단 아케미가 맞는지 직접 확인해볼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까 전 A처럼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이고 현관으로 향해, 문에 달린 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거기에는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의 아케미가 있었다...
큰일이다.
애초에 도대체 어떻게, 왜 날 따라온거지?
우린 잠깐 말만 섞었을 뿐이지 깊은 관계도 아니잖아?
잠깐 전철에서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이게 뭐람.
온갖 생각이 머릿 속에서 휘몰아친다.
일단 나는 방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밖에 있는게 아케미가 맞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집에 아무도 없는 척 하자는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왔지만, 어불성설이었다.
당장 방에 불도 켜 있을 뿐더러, 아까 전까지만 해도 술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들었으니 문밖으로 소리가 다 새나갔었을 터였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옷장 속에 숨어있고, 집 주인인 A가 그런 사람은 못 봤다고 대충 말로 때우자는 의견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 소리만으로 얌전히 믿고 물러나줄지도 의문일 뿐더러, 흉기까지 가지고 있다.
아무 대책 없이 문을 열어주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 사이 문 밖에서는 [K군, 여기 있지? 여기로 들어오는 거 다 봤어. 왜 인사도 안 하고 도망쳐버린거야? 너무해. 제대로 이야기 해야지...] 라는 아케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A는 [너 완전히 미행당했잖아! 애초에 이름은 왜 알려줬던거야!] 라며 초조한 듯 따져물었다.
목적지 전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왔는데, 어떻게 따라왔는지, 내 머릿 속은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려고, 작은 목소리로 계속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 때였다.
현관문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끼이익! 끼기기기기기기기기기긱!]
금속끼리 마찰되어 나는, 무척 기분 나쁜 소리였다.
A는 다시금 문으로 향해 밖을 내다보고 돌아와,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진짜 큰일났어... 저 여자 식칼로 문을 긁고 있어... 어떻게 하냐...]
그 사이에도 문 밖에서는 [K군...], [나와서 이야기 하자.] 라며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때, 소란스러움에 화가 났는지, 옆집에서 [시끄러! 지금이 몇신데 뭐하는 짓이야!]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금속음도, 아케미의 목소리도 잠시 멈추더니, 잠시 뒤 [으악! 뭐야, 너!]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곧이어 아까 들려오던 소리가 들려온다.
[끼기기기기기기기긱!]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옆집 사람은 괜찮은 걸까.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갈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을 거듭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문득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경찰차가 보였다.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누가 이 상황을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한 듯 했다.
우리는 다행이라고 마음을 놓았다.
곧이어 문 밖에서 [거기 서!] 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바삐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리고 조용해졌다.
곧 초인종이 울리고, [괜찮으십니까?] 하는 경찰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겨우 끝난 것 같았다.
A가 문을 열고, 우리는 경찰관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케미는 경찰관이 다가오자, 냅다 밀치고 아파트를 벗어나, 담장을 타고 넘어 도망쳐, 현재 추적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아케미라는 것, 우리 대학에 다니는 거 같다는 것, 아무래도 나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을 전했다.
그러자 경찰은 한동안 아파트 주변을 순찰해보겠다며, 위급할 때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알려주고 돌아갔다.
경찰에 신고를 했던 것은 옆집 사람이었다.
하도 시끄러워 옆집 사람이 문을 열고 소리를 쳤더니, 아케미가 식칼을 들고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 바로 문을 닫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다행히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나는 그 다음날로 학교를 찾아가 아케미라는 이름의 학생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그런 학생은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결국 경찰도 아케미를 추적하는데 실패했고, 신원 파악도 전혀 불가능했기에 수사는 그대로 종료되었다.
이렇게 모든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리라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6월 말.
그 무렵이 되자 경찰에서도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순찰을 종료했다.
나 역시 이제 별 일 없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
그게 실수였다.
그 날, 밤에 배가 출출해진 나는 뭐라도 사오려고 역 앞의 편의점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시간은 대략 밤 11시 즈음이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밖으로 나왔는데, 아직 막차 끊길 시간도 아닌데 역 앞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난번 아케미랑 만났을 때와 똑같았지만, 나는 그저 사람이 없구나 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동안 어두운 밤길을 걸어, 언제나 지나다니던 공원에 도착했다.
그러자 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거리가 꽤 있었던데다 가로등이 그리 밝지 않아서 누구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저기서 뭐하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그 사람이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그게 여자 같다는 걸 깨닫자, 나는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예상대로, 달려온 것은 아케미였다...
아케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드디어 만났네.] 라고, 기쁜 듯 말했다.
손에는 지난번 봤던 그 가방이 들려있다.
그 안에 식칼이 들어있으리라는 것은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상대가 아케미만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라고 시덥지 않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도망쳐야한다는 생각만은 확고했다.
아케미와는 아직 4, 5m 가량 거리가 있다.
그녀가 신고 있는 건 굽이 높은 구두니, 분명 달리는데 걸리적거릴 것이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있던데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부였기에 체력에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이대로 아케미를 뿌리치고 도망치면 충분히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집 방향으로 뛰면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타이밍을 노려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도중, 문득 경찰관에게 위급 상황에 전화하라던 연락처를 떠올렸다.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휴대폰이 없다.
그러고보니 금세 먹을 거만 사고 돌아오리라는 생각에, 휴대폰은 충전기에 꽂아 두고 나왔었다...
후회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아마 1km은 족히 달렸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괴이하게도, 그 사이 차는 몇 대 지나갔지만 사람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늦은 밤중이었다고는 해도 이상한 일이다.
과연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달리다 지친 나는, 설마 이 정도 달리면 괜찮겠지 싶어 일단 멈춰선 후,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 공원에는 요새 보기 드물게 공중전화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도중에 아케미를 만날지도 모르지만, 요새 공중전화는 어지간해서는 찾기 힘들다.
지금 온 길과 다른 경로로 공원에 돌아가,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온 신경을 쏟아가며, 신중하게 다른 길을 택해 공원으로 돌아왔다.
공원에 도착해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한 바퀴 돌았지만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심한 나는 공중전화로 향해 문을 열었다.
그 때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생애 최대의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발 아케미가 아니었으면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뒤돌아 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당연하다는 듯, 사랑스러운 얼굴로 싱긋 웃고 있는 아케미가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나는 큰 소리를 지르며, 한심하게도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케미는 그게 우스웠는지, 나를 내려다보며 킥킥 웃고 있다.
그 웃는 얼굴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그렇기에 더욱 기분 나빴다.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허세를 부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거야!]
그러자 아케미는 또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K군 바지 주머니에 '내가' 있으니까 그렇지. K군이 어디에 있던 찾아낼 수 있어.]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역시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멍하니 앉아 있자, 아케미는 [오른쪽 뒷주머니야.] 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주머니를 뒤져보라는 것 같다.
말을 듣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나는 바닥에서 허리를 살짝 들어,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안에 무언가 길쭉한 것이 잡힌다.
건전지인가 싶어 그것을 꺼냈다.
하지만 가로등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 같이 생긴 것이었다.
[으아악!]
나는 또 한심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그것을 멀리 내던졌다.
하지만 던지는 순간 느꼈지만, 그건 감촉이나 질감에서 결코 진짜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네킹 같은 것의 손가락인 듯 했다.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아케미는 생긋 웃으며, [버리면 안 돼.] 라며 손가락을 주웠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주머니에 다시 손가락을 넣고, 귓가에 속삭였다.
[또 '나'를 버리면 죽여버릴 거니까.]
나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머릿 속이 새하얗게 되어 그저 그녀에게서 얼굴을 피할 뿐이었다.
위험해.
이 아이는 정상이 아니야.
어떤 수를 내지 않으면 살해당할거야...
하지만 머릿 속은 패닉 상태라, 도저히 냉정한 사고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케미는 [이런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네. K군네 집으로 가자.] 라고 말하며, 내 팔을 잡고 한 손으로 나를 일으켰다.
참고로 내 키는 175cm에, 몸무게는 72kg이다.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이, 보통 여자아이가 한 손으로 일으킬 수 있는 체구가 아니다.
아케미의 힘은, 도저히 10대 여자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셌다.
상식을 벗어난 일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내 팔을 잡고, 아케미는 계속 내 집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우리 집이 어디인지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알아차렸다.
지난번 전철에서 들었던 철컥...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플라스틱처럼 가볍고 딱딱한게 서로 부딪히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다.
아케미는 싱글벙글, 기쁜 듯이 웃고 있다.
그제야 간신히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철컥거리는 소리는 아케미가 걸을 때마다 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걷고 있는동안 아케미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내 팔은 꽉 잡고 있어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집까지 가는 동안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을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데다, 도망쳐도 금새 찾아내는 아케미를 뿌리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침내 집까지 와 버렸다.
방에 들어오자 아케미는 재밌다는 듯 내 방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남자 혼자 살면 역시 난장판이구나...] 라며 여기저기를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 죽을 지경이다.
당장은 웃고 있지만, 이 제정신 아닌 여자가 언제 기분 나빠질지 모른다.
그리고 기분이 나빠지면, 분명 나는 살해당할 것이다.
그 사이 그녀는 [방이 어지러우니까, 내가 치워줄게!] 라고 말했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참 보기 좋을 것이다.
마치 사귄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자친구를 처음 집에 데려온 것 같이 보이겠지.
하지만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건, 커다란 식칼을 가방 속에 숨겨 다니는 정신 나간 여자다.
그리고 나는 그 정신 나간 여자에게 사로잡힌 불쌍한 사냥감인 것이다.
아케미는 또다시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방 구석에 어지럽게 쌓여 있던 잡지와 만화 같은 것들을 종류별로 나눠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머리카락이 걸리적거렸던지, 살짝 뒷덜미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아케미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을 때 보였던 목덜미에는, 얇은 선이 연결되어 그게 등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딱 목덜미 윗 부분만은 선이 느슨하게 풀려 있어, 거기만 목과 등이 부딪히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느슨한 부분이, 아케미가 움직일 때마다 부딪혀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본 것이었지만,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아케미의 목과 등은 실로 이어져 있었다.
내 머릿 속은 물음표로 가득찼다.
도대체 저게 뭐란 말인가.
내 눈 앞에 있는 저건 무슨 존재인 것이가.
그제야 나는 아케미가 정신병자가 아니라, 혹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인간이 아닌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계속 아케미의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자, 그것을 깨달았는지, [왜 그래... 부끄럽잖아.] 하고 귀엽게 웃으며 계속 방 청소를 한다.
그 때, 선반 위 쪽에 놓여 있던 전공서랑 사전이 그만 아케미의 머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쾅!
큰 소리가 난다.
곧이어 아케미가 [아파라...] 하며 머리를 문지르며, 멋쩍다는 듯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상했다.
느슨해진 부분 때문에, 목과 몸이 이상하게 어긋나 있었다.
아케미는 [어라...] 하고 목을 다시 들어올려 끼워 맞춘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방 청소를 이어갔다.
내 머릿 속은 완전히 패닉이었다.
도대체 저것은 뭐란 말인가.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내 눈 앞의 저것이 결코 인간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서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러자 문득 침대 옆에 놓여있는, 충전기에 꽂혀 있는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이걸로 경찰관에게 연락을 하자.
나는 아케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그리고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침대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핸드폰 만지면 안 돼.]
아케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말 한마디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곧 아케미는 일어서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핸드폰을 충전기에서 뽑아 자기 가방 안에 넣고, 다시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든 궁리를 해야겠지만, 연이은 충격 때문에 생각도 잘 할 수가 없다.
주변을 둘러보자, 안에 물이 들어있는 전기 주전자가 눈에 띄었다.
그걸 보자, 평소라면 결코 생각지 않을 방법이 떠올랐다.
이 안에는 적당히 물이 차 있어 꽤 무겁다.
이걸로 머리를 후려치면 아무리 아케미라도...
딱히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평소라면 당연히 여자아이를 때리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
거기에 아케미는 성별을 떠나, 애초에 인간이 아니다.
주저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주전자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고 소리지르며, 아케미의 머리를 전력으로 때렸다.
아케미는 그대로 반대쪽 벽까지 날아가 쓰러졌다.
그리고 내가 상태를 보려 하자, 벌떡 상반신을 일으켜, [아파라... 뭐하는 짓이야!] 라고 마치 장난이라도 당해 화난 척 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그런 아케미를 보고 무서워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대답이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상반신을 일으켰을 때, 아케미의 얼굴이 무서웠던 것이다.
얼굴 중 코에서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코에서 아래만 남은 얼굴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인간이 아니다.
충격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만, 곧 나는 정신을 차렸다.
손에 들고 있던 주전자를 아케미에게 내던지고, 나는 현관으로 뛰쳐나가 그대로 도망쳤다.
그리고 도로에 나와 아파트 쪽을 뒤돌아 보았다.
거기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펄쳐지고 있었다.
내 방은 2층이다.
거기서 아케미가, 창문을 열고 뛰어 내리려고 하고 있던 것이다.
한 손에는 식칼을, 다른 한 손에는 떨어져 나간 자신의 얼굴을 든 채,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공포에 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에서는 마구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뭘 어떻게 해야할지도 생각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뒤 쪽에서는 작게나마 철컥거리는 소리가 난다.
분명 아케미가 나를 쫓아오고 있는 소리겠지.
나는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 때 문득, 전에 아케미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또 '나'를 버리면 죽여버릴 거니까.]
'나'라는 게 뭐지?
본체가 그 손가락이라는 건가?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게 열쇠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버리지 않으면 어디까지고 쫓아올 것이다.
하지만 버리면 죽인다고 했고...
그러나 애초에 지금은 손가락을 버리던 버리지 않던 잡히면 그대로 죽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버릴지 버리지 않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버릴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큰 도로까지 나왔다.
그리고 도로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 앞에, 신사 기둥문이 보였다.
나는 아무 근거도 없이, '여기다!' 라고 생각했다.
이미 온 몸에 힘이 없어 어질어질할 정도였지만,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전력질주했다.
도로를 가로질러 신사 기둥문에 들어서, 주머니에서 손가락을 꺼내 그것을 신사 안으로 던졌다.
그와 동시에 도로에서 [끼이이이이익!] 하고 자동차의 급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신사 기둥문 앞에, 차가 멈춰서 있는 게 보인다.
혹시 아케미가 치인걸까?
조심스레 도로로 가보니, 3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차 앞에 서서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다.
경찰에 연락하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어딜 봐도 치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일 있나요?] 라고 묻자, 아저씨는 [그게... 지금 사람을 친 것 같은데... 아무도 없어서 말이야. 일단 경찰한테 신고를 해야겠다 싶어서.] 라고 대답했다.
타이밍으로 봐서는 차에 치인 것은 분명 아케미일텐데...
문득 도로 구석을 보니, 잔해 같은 것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보니, 그것은 인형의 잔해였다.
그리고 몸이나 다리 부분의 옷은, 어떻게 봐도 아케미가 입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아케미는 분명 인형 같아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잡한 게 아니라, 분명 누가 봐도 인간 같이 보였다.
이건 도대체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내가 손가락을 신사에 던져서 액운이 끊긴걸까?
그렇게 쉽게 모든 게 끝난걸까?
머릿 속은 다시금 물음표로 가득 찼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잠시 뒤 경찰이 왔다.
나도 일단은 목격자라고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자이기에 온갖 사정을 다 털어놓았다.
하지만 당연히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소리기에, 경찰도 믿어주질 않았다.
아케미 같은 걸 치었던 사람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인지, 왠지 흥분해서 경찰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딱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대개 인형은 손과 다리를 동체와 연결하는 조인트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인형은 그런게 전혀 없었다.
경찰도 그것은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즉, 도대체 어떻게 팔과 다리가 몸에 붙어 있었는지를 알 수가 없던 것이다.
아케미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안에 무언가 들어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온갖 두려운 상상을 해봤지만, 이제 와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인형의 잔해는 그대로 경찰이 증거품으로 가지고 돌아갔고, 이후 그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이없는 결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 내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보니 옆집 사람이 하도 시끄러워 신고했는지, 경찰이 와 있었다.
경찰은 방에 남아 있던 아케미의 가방을 증거품으로 가져갔지만, 결국 그녀의 신원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핸드폰에 관해, 나중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케미가 가지고 있던 핸드폰은 벌써 몇 년 전에 해약한 것이라, 서류상으로는 이미 폐기처리되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내 눈 앞에 아케미가 나타난 적은 없다.
다만 지금도 갑자기 인기척이 줄어들거나, 원래 사람이 드문 곳에는 가기가 꺼려진다.
인형에 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별로 억측을 가져다 대고 싶지도 않고, 이상한 상상을 했다 그게 현실이기라도 하면 그게 더 두려울 것 같다.
모든 것은 이 이야기를 읽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내가 직접 겪은 일이라는 것 뿐이다.
출처: https://vkepitaph.tistory.com/764 [괴담의 중심 - VK's Epitaph]
출처 : 밤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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